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거세지 않았으나 일기예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종일 내릴 것이다. 이런 날 체육관에 갔다면 옷을 갈아입다 말고 습하다고 한마디씩 했겠지. 오이카와는 오늘이 월요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옆을 흘끔거렸다.
이와이즈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오이카와와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었다. 역까지 가는 동안 속도가 느리다고 타박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집도 가까워 헤어지기까지 앞으로 30분은 더 잡아야 했다. 각자 집에 들어가면 아침이 되기 전까지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이 무슨 애틋한 감정인지. 그에 대한 확실한 단어가 떠오르기 전에 가방끈을 세게 쥐었다.
“이와쨩.”
줄곧 앞을 바라봤던 눈이 오이카와를 향했다. 여긴 학교도 아니고 체육관도 아니었으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우리 놀다 갈래? 집에 아무도 없대. 혼자서 밥 차려먹기 귀찮아. 오랜만에 영화도 보고 싶고.”
타인의 눈보다 더 무서운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곳곳에 내려앉았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 시험도 끝났으니까.”
날씨 때문에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다. 무슨 영화냐고 타박할 다음을 기다렸던 오이카와는 멍청한 표정으로 끄덕거렸다. 30분.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짧았는데 순식간에 늘어났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친구였다. 오이카와가 기억하는 시기보다 더 어렸을 때 만난 뒤로 지금까지 둘도 없는 친구인 채로 지냈다. 작년까지는.
이제는 친구라고 지칭하기 부끄러웠다. 전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너무 잦다거나 스킨십이 지나치다는 지적을 받은 뒤에야 깨달았다. 이와이즈미는 친구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왜? 언제부터? 자신에게 물어도 명확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깨닫지 못한 사이 감정이 깊어졌다.
누군가를 몰래 좋아할 수는 있다. 감정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지 않으니까.
보통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취할 행동은 두 가지였다. 말을 하거나 속에 숨기거나. 결과는 고백을 받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으므로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입장에선 잘 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할 만큼 맹렬히 타오르는 감정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불확실한 감정 때문에 친구를 잃을 수도 있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 대답할 수 없었다. 친구로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제가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끝없이 부정했다. 무작정 사실을 회피하고 싶은 제가 싫었다.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친구로도 남을 수 없게 된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일부러 등교 시간을 바꿨다. 하굣길도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둘만 남는 상황을 피했다. 몇 번이고 이와이즈미는 이유를 물었으나 오이카와는 시합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는 핑계만 댔다. 뻔히 거짓말임을 간파하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화를 냈다. 결국 일주일쯤 냉전 아닌 냉전을 벌이고 말았다.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려는 시도는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오이카와는 속을 알 수 없는 이와이즈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엇 때문에 피했는지 물어볼 만도 한데 집에 연락한 뒤로 줄곧 아무 말도 없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오이카와는 억지로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이와이즈미를 피하면서 감정을 억누르려는 동안 도리어 푹 빠져버린 탓이었다.
***
오이카와는 지금 상영하는 영화를 훑어봤다. 끌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되는대로 내뱉은 결과였다.
매달 새로 개봉하는 영화가 뭔지 찾아보긴 해도 영화관에 가서 볼 생각은 없었다. 오늘같이 오프가 아닌 이상 시간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타 지역에서 개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영화를 빌려서 보곤 했다.
고른 영화는 흔한 로맨스물이었다. 극장엔 어렸을 때 재밌게 봤던 만화의 리메이크작도 무난한 액션영화도 있었다. 평소라면 주저 없이 액션 영화를 선택했을 테지만 이번에 선택한 건 평소에 잘 보지 않았던 러브 스토리였다. 소꿉친구인 둘이 감정의 변화를 느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랬으니 결국 잘 풀려서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될 터였다.
내용은 예상한 대로, 좋게 말해 잔잔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성인이 된 후에도 둘은 친구였다. 앞으로도 쭉 친구라고 말하는 배우의 얼굴이 괴로워 보였다. 단순히 우정이라고 떠들어댔어도 실은 서서히 감정이 변하고 있었다. 친구마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오이카와는 눈가를 눌렀다.
-잠깐 착각했던 거니까 나, 싫어하지 말아줘.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킨 뒤 극장을 가득 메운 대사였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시선을 느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참으려 해도 다시 눈가가 축축해졌다. 스크린엔 언젠가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쏘아졌다. 로맨스물답게 잘 해결됐으나 어디까지나 영화이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고 주변이 환해졌다. 화장실을 거쳐 구석진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오이카와는 눈가를 닦아내야 했다. 이와이즈미가 어딘가에서 가져온 티슈를 받아들고 훌쩍거리자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네가 애냐?”
“이와쨩도 고질라 보고 운 적 있잖아.”
“몇 년 전 얘길 지금 하는 거야. 지금은 안 그래.”
영화 속 주인공은 행복해졌으나 오이카와에게 같은 행운이 찾아올 리 없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무엇 때문인지 걷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이제 됐어.”
“뭐가 돼. 아직 흐르잖아.”
혀를 차며 이와이즈미가 엄지로 오이카와의 눈가를 닦아냈다. 거의 말라가던 눈물은 손이 닿자마자 펑펑 솟아났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당황했다. 오이카와가 앉은 방향반대로 앉아 몸을 붙이곤 그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만 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이 났다.
영화관을 나온 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끌려다녔다. 언젠가 말한 적 있던 식당에 가고, 먹고 싶었다고 말했던 빵을 파는 카페에 갔다. 마지막으론 어렸을 때 자주 가던 베니 랜드 근처의 큰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꼭 데이트 같다고 생각하다가 착각하지 않기 위해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었다.
비는 그쳤다. 바깥에 비치된 벤치는 물기를 머금은 채라 앉을 자리를 찾는 대신 가로등 밑에 멈춰 섰다. 불빛 때문인지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붉게 보였다. 오이카와는 방금 마신 뜨거운 음료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심호흡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가까이 붙었다. 새끼손가락이 닿았다.
“너 무슨 영화 하는지 알아봤었지?”
“……일부러 그걸 보러 간 건 아닌데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어.”
거짓이 아니기에 오이카와는 편안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울었던 게 걸렸지만 원래 영화를 보다가 잘 울곤 했다.
“요새 서먹한 이유도 똑같겠지.”
“응?”
“요즘 묘하게 날 피했잖아.”
“그건, 이와쨩도 가끔 그랬잖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장 알아들었으나 믿을 수 없었다. 과대망상 같아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숨이 멎었다.
“생각하는 게 비슷했으니 그럴 수밖에. ……나도. 나도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되도록 오래 이 관계라도 유지하고 싶었어. 솔직히 아까 집에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놀랐어. 넌 집 비면 집으로 가자고 하지 밖으로 나돌진 않았잖아. 같이 놀자고 하고는 영화 보자마자 시무룩해져서 너 좋아할 만한 곳 생각하느라 머리 아팠어. 그런데도 계속 정신 못 차려서 정말 무슨 일 생겼나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 때문이야. 젠장, 주절거리는 것도 힘드네.”
이와이즈미가 마른세수를 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오이카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내가 손잡아도 불쾌하거나 이상하거나 그러지 않겠지?”
“너랑 내가 서로에게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싫어할 이유 없잖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와이즈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하나 전부 얽었다. 맞닿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비는 그쳤는데도 옷에 동그란 것이 자꾸 번졌다. 손가락 대신 입술이 눈물을 훔쳤다. 오이카와는 복잡한 가정 대신 선명하게 떠오르는 한 가지 감정만 생각하기로 했다. 보고 있어도 그리워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도 이와이즈미는 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