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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오이카와는 벅찬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머리 위를 덮은 방수 재질의 겉옷 위로 톡, 토톡. 잠시의 공백도 없이 빼곡하게 빗방울이 떨어졌다. 새벽 5시의 강변은 오가는 사람 없이 조용했고, 귀를 기울여도 사람의 인기척은 추호도 없었다.

11월의 새벽 공기는 차디찼고, 그 새벽의 빗방울은 얼음 같았지만 오이카와의 몸 속 깊이 울렁이는 열기를 재우기엔 부족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가느다랗게 펄떡이는 제 손목 위에 손가락을 얹어, 1초에 내달리는 심장의 걸음 수를 세어보던 오이카와는 이내 부질없는 짓이라며 제 손을 털어내었다. 조금 전까지 2km가 넘는 강둑을 단 한번의 휴식도 없이 내달렸지만 오이카와의 심장이 흔들리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 오늘따라 오버한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귓바퀴에 달라붙었다. 아니, 달라붙은 쪽은 제 귓바퀴 쪽이었다. 평범하고 여상스러운 목소리가 달콤하기 짝이 없게 들리는 것은 목소리의 주인 탓이 아니었으니까.

 

강아지처럼 꼬리가 있었다면 오이카와의 것은 프로펠러마냥 날뛰었을 것이 분명했다. 인간이라 다행이야. 오이카와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가장했다.

 

"그런가? 이와쨩이 못 따라오는 건 아니고?"

 

베시시, 오이카와의 눈꼬리가 가늘게 접혔다. 말려 올라가는 입술 끝과 그 사이로 살짝 보이는 하얀 이까지, 오이카와는 제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웃음을 띄웠다. 계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제일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만 들어갈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와이즈미는 호흡을 정리하며 제 얼굴깨를 따라 흐르는 빗물을 훔쳐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저기, 이와쨩. 대화할 땐 상대방 얼굴을 봐야 하는게 아닐까. 노림수가 소용없어진 탓에 섭섭해진 오이카와가 중얼거려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오이카와가 입을 비죽거리거나 말거나, 이와이즈미는 아랑곳않고 걸음을 옮겼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오이카와는 터덜터덜, 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래, 뭐.. 들어갈 시간이긴 했다.

 2

오이카와 토오루와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서로 사귀는 사이이다.

이 명제에 대하여 참이냐 거짓이냐를 고른다면 오이카와는 주저없이 참을 고를 수 있었고, 어찌됐든 이와이즈미 역시 참을 고를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무뚝뚝하고, 매정하리만치 둔한 구석이 있었지만 제 입으로 말한 것을 무르는 비겁한 성정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않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글쎄. 사귀기로 한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약 2주라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동안 이와이즈미가 보여주는 일련의 태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오이카와는 도무지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연애라는 것의 범주에 들어가는 관계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오이카와 자신이 유난스럽기 때문은 아닐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도 있었다. 오이카와는 제 멋대로 삐죽대는 입술을 잘 갈무리해 눌렀지만, 해소되지 않은 불만 때문에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어넣어라, 입술."

못생겨보이니까. 하고 인정사정 없이 꽂혀드는 잔소리는 야속함을 넘어 잔인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와쨩은 연애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불만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터져나왔고, 수원은 이와이즈미 단 한 사람이었다.

남자와 남자 사이의 연애가, 남녀간의 일반적인 연애와 조금 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질은 연애이기에, 그 근본적인 부분에서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라고 해서 남자와 하는 연애가 두번째인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와 하건 연애는 연애니까. 이와이즈미는 연애가 처음이니까, 그리고 남자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연애와 다른 색, 다른 맛일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각오도 했지만 그래도 이건 해도해도 너무 하지 않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로, 무엇보다도 사귀는 사이가 되었음에도 둘의 관계에 조금도 다른 느낌이 없는 것이 오이카와에게는 못내 서럽고 걱정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이 관계는 시작부터 오이카와의 불안과 함께했다. 오이카와는 교사의 구석에서,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이와이즈미를 세워놓고 긴장으로 꽉 막힌 제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고백했던 순간이 생생했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꿉친구라는 자리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숨겨 둘 수가 없을 만큼 그 마음에, 감정에 압도되었다.

애정어린 마음이 범람해 가끔은 문자 그대로 숨이 막혔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이와이즈미가 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다. 이와이즈미의 웃음 한 조각에 벅차올라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겨우 눌러 삼킨 것만도 수십번이었다.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닳은 이후로 오이카와는 하루 하루가 감당 못할 행복이었으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갈망이었다. 손을 뻗으면 언제든지 잡혀줄 것 같은 이와이즈미가 결국에는 친구임을 깨닫는 매 순간이, 가슴 아프다 못해 가끔은 괴로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고백은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라기보단 충동에 가까웠다. 배구부의 단체 생활 속에서 단 둘만 있는 시간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그 날은 우연히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동시에 쓰레기 당번이 된 날이었다. 배구 연습을 가기 전 약간의 시간적 여유. 평소라면 마츠카와, 하나마키와 함께 탈의실에서 농담 따먹기를 하며 스트레칭을 하는 것만으로도 금새 사라져버릴 정도의 짧은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충동에 이유는 없었다. 바람에 날려 구석으로 굴러간 휴지조각 하나도 주워 집어 넣는 모습이, 바보처럼 허둥거리다가 쓰레기통 안에 남은 잔해를 바닥에 쏟아부어버린 오이카와를 타박하면서도 제가 나서서 수습을 해 주는 모습이. 아니, 그냥. 초가을의 바람이 이와이즈미의 짧은 머리칼을 마음껏 쓸어넘겼고, 기울어지기 시작한 태양이 잔잔하게 자리잡은 두 뺨, 입술, 콧잔등이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좋아해."

언제부터, 얼마나 내가 너를 그리고 마음에 품어왔는지는 조금도 입혀내지 못한 날것의 고백은 촌스럽기 그지 없었다. 첫 고백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한심해서 어쩌지도 못한 채 눈만 굴리는 오이카와의 앞에서 이와이즈미는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는 이와이즈미의 태도에 입술만 깨물던 오이카와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친구로 좋아하는거... 아니야. 이와쨩은... 몰랐겠지만..."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덩달아 고개도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제 발끝만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앞니로 씹었다. 어떡해야 하지. 조그만 머릿속이 분주했다. 이대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이와쨩이 가 버리면 어떡해야 하지. 오늘 연습은. 아니, 앞으로는. 우리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느샌가 시야가 흐려졌다. 눈가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면서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으려 숨을 들이켰다.

 

"흐읍.."

 

티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들어도 분명한 울음이 새어나온 탓에 오이카와는 제 귀와 뒷목까지 발갛게 타오르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동시에 눈물이 왈칵 솟아올라 오이카와는 얼른 몸을 돌렸다. 더 이상의 꼴사나운 모습은 싫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 오이카와는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에 손부채질을 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은 벗어나는게 급선무였다. 허둥지둥 이와이즈미의 반대방향으로 멀어지는 오이카와의 뒤에서. 그제서야 답이 들려왔다.

 

"그럼 사귀자."

 

바삭, 모래를 밟는 소리가 여느때보다 크게 들렸다. 한계까치 차오른 눈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넘쳐흘러 뺨을 타고 턱끝에 매달렸다. 믿을 수 없어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과 같은 얼굴을 한 이와이즈미가 양 손에 오이카와 몫의 쓰레기통까지 든 채로 따라오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걸음 걸음을 그대로 밟은 것처럼, 처음과 같은 거리를 두고 이와이즈미는 다시 멈춰섰다.

 

히끅.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도무지 로맨틱함이라고는 없는 전개에 오이카와는 양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 사귀자는 말을 겨우 들었는데, 거기다가 딸꾹질로 대답하다니. 오이카와의 뺨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의 의미를 착각했는지 이와이즈미가 뒷목을 긁적이며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귀자고."

 

사귀자는 말을 대체 누가 그렇게 하는지. 그럼에도 그 순간에는 그 말이 못내 좋아서, 오이카와는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가능하다면 꿈이 아닌지 제 뺨을 꼬집어보고 싶을 정도로. 믿어지지 않을만큼 좋았다. 절절히 끓던 가슴에 찌르르 감동이 퍼져서 손 끝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생각했던 것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이와이즈미의 모습에, 오이카와는 그가 친구로서의 애정과 오이카와가 가진 애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거지, 하고 조심스럽게 오이카와가 물었을 때 분명 이와이즈미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고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 좋으면서도 불안해서. 두근거림의 원인이 행복인지 불안인지 알 수 없어서. 오이카와는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조차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한 채 주춤주춤 이와이즈미의 눈치를 살폈다.

 

왜 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건지. 아니나 다를까, 이와이즈미는 저와 오이카와가 아무 것도 아닌 친구 사이였을 때와 조금도 변화 없는 태도로 오이카와를 대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그 때 그렇게 사귀자고 말하지나 말 것이지.

 

하아, 저절로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부러 뱉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참에 눈치라도 좀 채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곁눈질을 해보았지만 이와이즈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

 

연애. 인간의 육체적 기초 위에 꽃피는 자연스런 애정.

 

국어사전에서 찾은 아주 곰팡내 나면서도 예리한 정의에 따르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기 마련인 애정, 그 포괄적이고도 다양한 감정 중에서도 육체적 기초 위에 꽃피는 애정이 연애라는 것인데.

 

그 정의에 따르자면 오이카와씨의 것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를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한창 때의 남고생의 연애임에도 불구하

고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보이는 태도는 (오로지 연애라는 관점에서 표현하건데) 건전함을 넘어서 경건하기까지 했다. 똑같이 한창 때의 남고생인 오이카와의 입장을 말하자면, 뭐. 그래. 솔직히 말해서 이와이즈미에게 사심을 좀 넣어달라고 사정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의 순수함이었다.

 

사귄지 이 주나 되었음에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손가락 끝 한번을 잡아보질 못했다. 손 끝이 다 뭐냐. 사귀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쥐어박던 주먹조차 사라졌고(하기야 사귀는 사이에도 쥐어박히고 싶다는 뜻은 아니지만), 연습 중의 하이파이브, 자연스러운 어깨나 팔의 부딪힘까지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오이카와 쪽에서 의식적으로 이와이즈미와 거리를 벌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 변화의 답은 단 하나였다.

 

어색할 정도로 벌어져 있는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 오이카와가 조금 다가서기만 해도 이와이즈미는 자석의 같은 극끼리 멀어지듯, 오이카와의 반대 방향으로 한 발자국 제 몸을 떨어뜨리기 바빴다. 연습 시합 중에, 점심시간에, 사귀지 않을 때에는 오이카와는 태연을 가장해 이와이즈미의 몸에 슬쩍 매달려보는 호사를 누릴 기회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평소와 전혀 다를바 없는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의 구박에 부러 우는 시늉을 하며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기만 해도 이와이즈미는 화들짝 놀랐다.

 

오이카와 씨가 뭐 대단한 거라도 했으면 말이라도 안 하지. 허탈하고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차올랐지만 오이카와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옛 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이럴 거면 왜 사귀자고 말한 걸까. 좋아한다고 오이카와 씨가 말하긴 했어도 딱히 사귀어달라고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오이카와는 교과서 귀퉁이에 의미 없이 둥글둥글 원을 그리며 생각에 빠졌다. 건너편 창가에 앉은 이와이즈미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오이카와는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솔직히 요즘은. 이럴거면 사귀지 말 것을. 아니 고백하지 말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이카와가 상상한 둘의 연애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무어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사귀기 전이 나을 거라고 생각 할 정도의 최악의 관계를 바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말수가 적어지고 무뚝뚝해진 이와이즈미는 꼭 아무 이유 없이 화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모든 것이 싫어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이와이즈미를 보면 오이카와는 난생 처음으로 그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고, 그리고 사무치게 낯설어서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외딴 곳에 내버려진 것만 같다는, 어찌 보면 허황되기까지 한 사무친 외로움에 빠져들었다.

 

생각할 수록 서러워지다 못해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오이카와는 빠르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이런 걸로 고민하는 것도 서러운데 울기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연애감정"

​첫 문장, 비가 내렸다.

리체 - 제목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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