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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걸로 고민하는 것도 서러운데 울기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폰으로 라인만 계속 보고 있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내 모습은 누가봐도 한심해 보일 것만 같았다. 아니 한심했다. 하지만, 서럽고 서러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너와 나의 인연이, 너와 나의 시간이 가벼워질 것이라는 것을, 중요해지지 않을 것을. 언제까지라도 나는 너와 계속 연락을 하고, 이야기를 하고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주위의 평범한 인연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근데, 전부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대학에 가서 초반에 연락이 없었던 것은 아, 많이 바쁜가 보네. 하기사 바쁘겠지. 선배들한테 까이는 그 생활도 다시 해야하고, 비유 맞춰서라도 이미지 관리 다시 해야하고, 배구 실력도 향상시켜야 하고, 연습도 해야하니까. 그러니까 너무 바빠서, 잠시 나를 잊었나 보지. 연락 하기 힘든가 보지. 그럴 수 있어. 너도 힘들어서 최근에 연락 안하잖아. 하나마키랑 마츠카와한테 말이야. 힘들지. 대학이라는 학교 제도에서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일궈야 하니까.

 

 

대학에서 더이상 신입생이 아니라 1학년이라 불릴 때쯤, 너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대학 입학 전날까지만해도 하루에 10-20개의 라인을 보내는 네게서 연락은 단 한통도 오지 않았다. 나는 얘한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 아닐까. 야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꾸준히 보내. 얘는 체대라서 갈굼당하고 있어서 매일 기절하겠지. 또 오버워킹하고 실신하는 건 아니겠지? 어디 다친건 아니겠지? 너의 상메가 바뀌고, 프사가 바뀌어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얘가 나를 잊을 수가 있겠냐며. 잊어버린 건 아닐까. 그나저나 얘 요즘 라인 아예 안하나봐. 어떻게 프사가 여전히 가을이냐? 지금 계절이 가을인데. 하여튼 얘 내가 없으면 안된다고. 사실 오이카와가 없으면 안되는 것은 나인데. 연락 올 정도의 여유가 되면 정신 차리라고 이야기라도 해야지, 나원. 언제까지 애같은 상태로 지낼껀지.

 

 

그러다가 애써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2.

 

 

더 이상,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며, 야 쟤 바쁘네.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오이카와의 라인을 구경하지 않았다.

 

더 이상, 오이카와와의 메세지 기록을 구경하지 않았다.

 

더 이상, 라인 알림이 오면 급하게 확인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내가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도중, 오이카와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이카와 [이와이즈미. 오늘 시간돼?]

 

 

3.

 

 

이와짱이 아니어도 좋다.

 

바람과 함께 스쳐지나가는 나뭇잎 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바사삭-바삭 소리를 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 좋다.

 

바닥에 밟히는 벚꽃덩어리들은, 왠지 뭉클뭉클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저, 너한테 아직 필요 있는 사람이라는 게 기뻐서.

 

 

이 코너를 넘으면, 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걸음은 몇발짝 남겨두지 않았음을 인식한 탓일까, 경직되어갔다. 애써 자연스럽게 움직였지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 아니지. 사람에 대해 잘 관찰하고 있는 네가 눈치 채지 않았을까 계속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너는 내게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 아닌데.

 

 

4.

 

 

오이카와 [이와이즈미. 오늘 시간돼?]

 

나 [뭐냐?]

 

오이카와 [칼답봐...ㅋㅋㅋㅋㅋ 오늘 술마시러 갈래?]

 

나 [이제 하다못해 술도 마시냐? 야, 너 운동선수야. 술 마시면 안된다고. 몸 나빠져.]

 

오이카와 [뭐야, 이와이즈미.ㅋㅋㅋㅋㅋㅋ 변한게 없어. 완전 꼰대야. (웃음)]

 

나 [죽인다.]

 

오이카와 [너무해...8ㅁ8]

 

나 [뭐라는거야. 할말이 뭔데.]

 

오이카와 [술 마시자아아-]

 

나 [와, 극혐]

 

오이카와 [상처라고!]

 

나 [어쩌라고]

 

오이카와 [...]

 

나 [나, 바빠. 본론만 말해.]

 

오이카와 [그니까- 술마시러 가자. 오늘 7시 어때? b대 앞쪽 **곱창집에서.]

 

나 [너 거기도 아냐? 거기 완전 b대 숨겨진 맛집 1위라고 ㅋㅋ]

 

오이카와 [아, 전에 애들이랑 갔어. ㅋㅋㅋㅋㅋㅋㅋㅋ 숨겨진 맛집 1위 뭔데 ㅋㅋㅋㅋㅋㅋㅋ]

 

나 [말 그대로지. 뭔 의미가 있겠어.]

 

오이카와 [그럼 이따봐! 이와이즈미 주량 세지?]

 

나 [평범하게 1병. 넌?]

 

오이카와 [난 2병이지롱~ 이와이즈미 분발하라고!(비웃음)]

 

나 [너 이따 두고 봐.]

 

오이카와 [이따봐~(웃음)]

 

 

 

5.

 

 

오이카와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6.

 

 

내가 먼저 할 수 있었던 그 흔하고 흔한 그 연락 한통. 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말로 내가 네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을까봐, 정말로 너가 내 이름을 잊은 건 아닐까. 연락이 오고 나서야 아, 얘, 이와이즈미잖아.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연락하기 전에 네가 먼저 나를 기억해서 연락을 주기를 바랬다. 내가 불안해지기 전에 네가 내게 와서 다독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위에 스쳐가는 어릴적의 추억인 소꿉친구 중 한 명으로 남는 것이 아닌.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우리의 사이는 과거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차차, 현실을 인정해가며 나도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과연 나는 특별한 친구로 만족 하는 걸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상황은 복잡해졌다. 어디까지나 친구이기에 네 곁에 남고 싶고, 네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왜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걸까. 상관없는 질문 아닌가?

 

 

7.

 

 

“이와이즈미!”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던 것은, 너였다. 오이카와 너였다.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모양은 아니었다. 어깨는 조금더 넓어 진 것 같았고. 근육도 더 탄탄해 진 것 같았다. 얼굴에 생기도 도는게 못 먹고 다니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웃음이 나왔다.

 

 

"건강해보이네."

 

"이와이즈미도!"

 

 

계속 우리는 과거의 관계가 아니야. 라는 식으로 이와짱 대신 이와이즈미처럼 들리기는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났다는 것이 더 기쁜 내게 있어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기는 지글지글 익어가고 그 사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뭐하고 있고. 어떻게 지냈고. 그리고 주로 오이카와 중심적인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러다 순간 내가 이야기의 화재를 바꿀 타이밍이 있었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기를 집어가며 구웠다. 시선을 고기에만 집중해, 내 떨리는 동공을 보지 못하게했다.

 

 

"최근에 이와짱이라 안부르네?"

 

"응응. 이와이즈미 싫어했잖아."

 

 

오이카와는 고기를 입안에 가득넣어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은 썩어갔다. 뭔, 개같은.

 

 

"안 싫어하는데?"

 

"에? 진짜? 대학에서 호칭 문제로 죽빵 맞을뻔 한 적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싫어하면 호칭 바꿨거든."

 

 

내 대답을 듣고 안심한듯한 그는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앞으로도 이와짱이라 불러도 돼?"

 

"어."

 

"꺄아아아- 이와이즈미라고 부르는 거 얼마나 답답했는데!"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거면 아예 고등학교때 바꾸지. 그 말을 덧붙이니 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성인 전 까지는 세세한거 신경 안쓰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했어.

 

너무 그 녀석 다운 답이라 할 말이 없었다.

 

 

8.

 

 

"야, 너 걔 좋아하는 거네."

 

 

9.

 

 

술이 어느정도 들어갔을때 오이카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왜 연락 한번도 안했는데… 내가, 응? 내가! 이와짱 연락을 얼마나 기달렸는데!!"

 

 

얘 인간은 맞을까. 벌써 2병 반째였다. 이렇게 많이 마시면 내일 후회할텐데.

 

 

"어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지. 매번 연락을 보내는 인간이 갑자기 연락 끊기면 뭔가 삐진건가 위험한가? 싶으네 또 상메나 프사보면 그런것도 아니니까 애매하고."

 

"이와짱 내 상메나 프사 매일 봤어?"

 

 

이와이즈미 하지메. 대답 잘 해야 한다. 이거 진짜 심각한 문제야. 대답 잘못하면 다시는 이런 관계가 될 수도 없다.

 

 

"뭐, 가끔? 네 녀석이 자기는 첫번째로 떠여한다면서 이름도 바꿔버리고 즐겨찾기 해놨잖아."

 

"아… 맞아… "

 

"뭔 대답을 기다린건데."

 

"으음~ 이와짱이 내 라인을 기다렸다는 대답일까?"

 

"그래그래. 기다리긴 했어."

 

 

그 대답이후 아무 말도 안하는 오이카와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니 얼굴이 빨개졌다. 술기운 만이 아니라 내 대답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그 빨간 얼굴이 색기가 가득한 것처럼 보여서 나도 위험했지만. 계속 그렇게 붉은 홍조를 띤 오이카와를 보니까 오이카와도 부끄러웠는지 나가자고 했다. 술기운 깼다.

 

 

이 관계, 일반통행은 아닌 것 같은데.

 

 

10.

 

 

"이와짱?! 왜 우리집에 있는거야?!"

 

"네놈이 중간에 말하다 말고 쓰러진거 알아? 그런데, 지금, 누구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오이카와는 차차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대충. 미쳤어. 오이카와. 정도의 내용인것 같았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내비러둔채, 나는 부엌에서 식탁위에 바구니에 가득한 숙취 해소제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이제 기억 났냐?"

 

"응…"

 

 

어제 무지개 날린 것이라도 생각 났는지 오이카와의 얼굴은 또다시 붉어졌다. 고개를 바닥으로 고정시키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 사이로 붉어진 얼굴은 여전히 보였다.

 

 

"이와짱. 대답은?"

 

"맞아."

 

 

오이카와 고개를 들으며 강아지같은 얼굴로 울먹이며 물었고, 나는 대답을 했다. 오이카와의 저런 얼굴에 내가 거절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같다. 화끈화끈 거렸다.

 

 

11.

 

 

 

"야야. 오이카와. 일어나봐. 정신좀 차려서 걸으라고."

 

 

나보다 키도 큰게 이 난리다. 꼭 술자리가면 애들 다 죽고 나만 살아남더라.

 

 

"이와짱!"

 

"아 또 왜!"

 

"좋아해!"

 

"어어 나도 널 많이 좋아해."

 

"갑작스런!! 자기소개 타임!! 오이카와 토오루! 방년 21세! 이와이즈미 하지메의 남자친구 입니다! 맞죠!!"

 

 

어라?

 

 

놀랍게도 오이카와는 그 말이 마지막 말이었는지 그 말을 남기고 잠에 들었다. 아 미치겠다. 이건 거울을 볼 필요도 없이 귀까지 빨개져있을 거야.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지. 여태까지 연락 없었던 것도 설마 나를 좋아한다는 거 깨달아서 연락 못했다가 나한테도 연락 없고. 그러다가 우리 서로 바보짓 한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런거 같은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헛웃음만 나왔다. 나는 도대체 이 단순한 애 가지고 뭔 생각 한건지.

 

 

그래도 덕분에 알게 된거니까 넘어갈까.

 

 

분명히 오이카와는 내가 저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고백한 것 같은데. 영약한 자식.

 

 

12.

 

 

놀랍게도 오이카와는 팀에서도 알아주는 술꾼으로 주량이 3병 반을 먹어도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잠쿨 - 흔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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