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시작이었다.
많은 밤을 지새웠다. 첫사랑이 마냥 달콤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순진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아프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웃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저려왔다. 그 가슴이 밤마다 두근거려서 잠도 잘 수 없었다. 일어나기도 전에 보고 싶고 일어나서는 대뜸 울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다 큰 반 어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아무 데서나 울고, 웃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빌어먹을 첫사랑.
귓불이 떨어져 나가겠다. 무슨 바람이 이렇게 세게 불어. 오이카와는 회색 줄무늬 머플러로 목을 칭칭 동여맸다. 매해 작년보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올해는 비교도 못 할 만큼 추웠다. 신발장 앞과 유리로 된 건물 현관 앞을 오고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발가락이 얼 것 같다. 먼저 마친 아이들이 인사하며 지나갔다. 그는 으응, 하며 고개를 까닥이거나 어깨를 으쓱거렸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으니, 한 여자애가 많이 추운가보네 하며 흔드는 손난로를 쥐여 줬다.
챠챠챠챠챠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손난로. 손끝이 녹자 한결 나았다. 난로를 흔드느라 열이 난 거지만 어쨌든 따뜻해지니 좋았다. 발은 동동거리고 손은 챠챠거리고. 입으론 마츠카와 반 담임 선생님을 욕했다. 그 반 선생님은 좀 유별났다. 너는 어쨌고 쟤는 저쨌고, 그날 하루 교무실 선생님들한테서 들은 아이들 수업 태도를 지적한다. 덕분에 다른 반 아이들이 하교하는 걸 지켜보느라 아이들 표정이 퉁명스러워진다. 그럼 또 말하지. 너희 지금 불만이라 이거야!
“오이카와.”
마츠카와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그를 불렀다. 뒤이어 하나마키, 이와이즈미가 줄줄이 내려왔다.
“늦어, 맛층!”
“어쩔 수 없잖아. 사츠가 그런걸.”
사츠는 마츠카와 담임의 별명이었다. 신학기에는 왜 셋만 같은 반이냐고 성을 냈었다. 지금은 다른 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와이즈미와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하나마키 옆에 붙어 섰다.
“어서 가자. 오이카와 씨 추워.”
“너 추위 안 타잖아.”
“작년 이맘땐 코트 없이 돌아다녔고.”
“그때랑 지금은 다르잖아.”
“뭘, 작년보다 따뜻하다던데.”
“됐어. 너흰 몰라.”
“너무 잘 아는 건 아니고?”
“늦은 주제에 다들 말이 많네, 오이카와 씨 배고파!”
당사자 앞에서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농담 투의 말이 오고갔다. 점점 화가 치밀었다. 이십 분 가까이 기다렸고, 손난로는 미적지근했다. 따뜻한 라멘 국물로 속이나 데우고 싶은데 여기서 농담 따먹기라니…. 한마디 할까 싶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배고프다잖아. …오늘은 라멘인가?”
꼭 오이카와에게 물어보는 투였다. 아니, 확인하고 있었다. 속을 훤히 꿰뚫는 척이다. 정말 오이카와의 속을 알고 있었으면 이와이즈미는 세상 더 없을 나쁜 새끼였다.
“아니, 함박스테이크.”
“그건 그만 좀 먹자. 물리지도 않아?”
“아니, 일주일 내내 먹어도 맛있는데.”
“내가 이래서 싫다는 거야.”
마츠카와랑 하나마키가 대거리하며 앞서 나갔다. 오이카와는 자리에 꼼짝 않고 있었다. 뒤에서 깔끔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꿈치와 엄지발가락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 등을 세우고 걷는 단정한 등. 얇은 팔을 붙잡은 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며 작게 움직이는 귀.
“안 가?”
이와이즈미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거기서부터 서서히 고동이 울렸다. 마치 제 심장이 가슴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로 간 것만 같다. 대뜸 눈물이 차올랐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걸어 나갔다. 그날, 이와이즈미가 처음 여자친구를 사귄 날처럼.
“가!”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작년보다 춥고 외로운 단 하루 때문에 올겨울은 내내 춥게 생겼다. 머플러를 코끝까지 올렸다. 마츠카와랑 하나마키는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옥신거렸다. 왼쪽으로 가면 함박스테이크, 직진하면 라멘집이 있다. 파란불로 바뀌었다. 결국 마츠카와가 하나마키를 끌고 왼쪽으로 갔다. 파란불이 깜빡거리며 숫자를 가리켰다. 워낙 신호가 길어서 조급하진 않았다. 오이카와가 빨리 친구 둘을 따라잡으려는 건 뒷사람과 나란히 걷고 싶지 않아서였다. 숫자가 25에서 21로 바뀌었다. 뛸까? 하는 순간 하나마키가 건너편에서 소리쳤다.
“야! 너희 어디가!”
“우리 라멘!”
이와이즈미가 등 뒤에서 대답하고 아까 그 자리에 다시 손을 올렸다. 머플러 안쪽에서 오이카와의 비명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어느새 숫자는 11이 되었다. 그는 이와이즈미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염치로 자신을 빤히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뛰자.”
“왜….”
오이카와는 물으면서도 이와이즈미를 따라 뛰었다. 그는 작은 여자애를 잡았을 때처럼 오이카와의 두꺼운 오른팔을 꽉 쥐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어있던 코끝이 서서히 녹아 이젠 붉게 변했다. 아니, 온 얼굴이. 오이카와는 머플러를 올리며 속으로 안 돼, 바보야, 안 된다고, 를 반복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이런 얼굴을 보기엔 너무 괘씸한 놈이었다. 자신이 좋아하기에는 너무 나쁜 놈이란 거다. 오이카와는 그날 자신이 느낀 비참함을 되새겼다.
이와이즈미에게 고백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그가 잡는 사람은 없었다. 있다면 자신, 오이카와 한 명뿐이다. 그런데 그 유일하며 무구한 법칙을 깨고 한 여자애가 들어왔다. 이와이즈미 어깨에도 못 미치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똑 단발에 눈매가 날카로운 그 아이는 그를 제치고 이와이즈미 옆을 차지했다. 오늘까지 딱 한 달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한 달씩이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옆을 내준 것이다.
“이거 놔.”
어깨를 털었다. 이와이즈미가 인상을 쓰며 이름을 불렀다. 예전 같았으면 왜 그러냐고 바로 물어봤을 텐데, 그 여자애한테는 신경 써주는 거겠지. 이런 사소한 것에서 차이를 느끼게 된다.
“먹고 싶음 미도리짱이랑 가지 왜 날 데려왔어?”
“계속 무시하잖아.”
“미도리짱이 무시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야.”
“걔 말고 너 말이야. 왜 자꾸 걔 이야기를 해?”
“할 만하니까 하지.”
“너…! 아니, 됐다. 들어가자.”
“안 가.”
“정말 이럴래?”
“혼자 가. 그게 싫으면 미도리짱 불러.”
“내가 싫다잖아.”
“그럼 혼자 가던지. 난 간다.”
“오이카와, 너 진짜…!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줬잖아. 그러고도 뭐가 부족해서 이래?”
이상한 말이다. 오이카와는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원한 적이 없다. 껄끄럽고 부끄러운 상황이 천천히 물러져서 오이카와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연해지기를 바랐다. 만약 그가 바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것도 이와짱이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 손을 밀어내고 집 방향으로 걸었다.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빨간 불이다. 구레나룻이며 턱 안쪽에 맺혔던 땀이 그새 식어서 얼굴 하관이 팽팽히 당겨왔다. 이와이즈미가 뒤를 잡아 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건데?”
“평생.”
“야!”
결국 큰 소리가 나온다. 오이카와는 힘껏 이와이즈미의 손을 쳐냈다. 짝 소리와 함께 이와이즈미의 몸이 휘청거렸다. 당황스러워했다. 오랜 소꿉친구가 갑자기 화를 내고 손을 내치는 충격이 대단했나 보다. 지금 얼굴은 딱 그거였다.
“내게도 시간을 달란 말이야, 너만 끝내면 다야?”
반면 오이카와의 얼굴은 첫사랑을 앓는 소년의 것이었다. 아픔을 숨기지 못하고 그럴 생각도 없는 사춘기 소년. 좋아하는 이에게 나 당신 때문에 아프다고 하소연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오이카와가 문제였다. 그는 17살 때 이와이즈미의 고백을 받고 떨떠름해 했다. 좋긴 했지만, 얘가 날? 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럼 이와이즈미는 게이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당시 한 학년 위의 선배와 사귀고 있었고, 이와이즈미 앞에서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18살 때 다시 한 고백에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여전히 미적지근했지만 적어도 되풀이해서 고민할 정도였다. 같이 하교하고 주말에 만나 데이트하는 상황을 상상했지만 그거라면 줄곧 하고 있어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뭐야, 그 말.”
“….”
“오이카와.”
그리고 19살 고백을 받기 전, 이와이즈미와 미도리가 만났다. 미도리가 한 고백이 문제였다. 거기에 넘어간 이와이즈미도. 고개 끄덕일 준비를 하던 자신도. 전부 문제였다.
“줏대 없어.”
“뭐?”
“손에 다 들어온 걸 놓치니까 좋아?”
오이카와는 멍하니 서 있는 이와이즈미를 두고 신호가 변한 횡단보도를 걸었다. 속으로는 잡아라, 잡아라, 하면서. 횡단보도의 흰 선만을 꾹꾹 밟아가며 뒤를 의식했다. 신호가 느리게 바뀌고 파란불이 깜빡거려도 이와이즈미는 한 자리에 있었다. 이윽고 빨간불로 바뀌고 둘 사이로 푸른 차, 초록 차, 파란 차가 가로질렀다. 점점 더 사거리 도로가 넓어졌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사거리 저편에 있다. 많은 차가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와이즈미가 횡단보도 앞 노란 선 위로 올라왔다. 그는 전화 받으라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처럼 급박한 표정이었다. 오이카와는 노란 선에서 물러나 파란불을 기다렸다. 그때까지 두려워하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잡으면 붙들리고, 잡지 않으면 가는 거야. 이제 노란불로 바뀌었다. 머플러를 목 끝까지 내렸다. 여전히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